에고에서 스승으로


에고에서 스승으로 cover
Cover of 에고에서 스승으로

총평

인간이 가지는 여러 관념과 감정에 대해 저자만의 정의와 해석이 담겨있는 책이다. 내가 상대적으로 예민해서인지 늘 특별한 감정을 느끼는 부분들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글을 읽으며 그것들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현상임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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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문제점

조건화

유아기: 부모는 스스로 체험했다고 착각하는 호·오, 선·악, 미·추 등 가장 주관적인 가치를 진심어린 충고나 사랑이 듬뿍 담긴 정보로 잘 포장해서 자식들에게 권유하거나 심지어 강제한다.

우리 부모님 만큼은 나로 하여금 세상의 것을 나만의 스타일로 경험하게 해주셨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나 역시도 부모님의 스타일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종종 느낀다. 단편적으로, 감각이 예민한 어머니로부터 옷을 고르는 법, 음악을 듣는 법 등을 배웠고, 아버지로 부터는 이성적인 사고방식과 계획성을 배웠다. 이보다 더 깊은 것들이 오랜 기간 내재화 되어왔으며 나도 자연스럽게 그것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음을 느낀다. 나의 가치관은 당연스럽게 또 나의 2세에게 옮아가겠지만, 그렇게 옮아가는 나, 그리고 사회화의 과정속 타인들의 주관적인 가치들에 대해 의심하는 방법은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것 같다.

아동기: …. 자신의 가치관과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것이 상호 충돌하더라도 대부분 사회의 가치관에 종속되어 적당한 선에서 절충…

장·노년기: …. 당신의 가치에 어긋나거나 반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고 심지어 상대를 설득하던가 혹은 강변을 통하여 당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라혀고 끊임없이 애쓴다. …. 다음 세대를 조건화시켜서 오염시킬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끝내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면서 평생의 연륜(?)과 지혜(?)를 후대에게 물려준다는 착각 속에서 그 대상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자신에게 편리한 기억을 선택하게 되어있다.

동일화

몸은 자신의 일부일 뿐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다. 이 ‘몸’과 나 ‘자신’을 동일화하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 비극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인간은 자신이 최소한 주변 인물들보다는 열등하지 않고 평균치보다는 조금이라도 위에 있고(워비곤 호수 효과), 어떤 면에서는 남들보다 우월하고, 어쩌면 최고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자신에게 계속 최면하면서 산다.

에고는 수용 가능한 흥밋거리를 지속적으로 찾아다니지만 기억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정보는 단호히 거부, 자신의 기억을 옹호, 방어한다. 에고는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고 있는 해석과 판단은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자동화

우리는 그저 일회성인 지식과 정보들을 끌어 모으지만, 그 얄팍한 정보의 축적은 그저 쓰레기 집하장처럼 되어버린다.

무수히 많은 쇼츠를 스크롤링하며 깨닫는다. 동남아에서 파인애플을 깎는 영상을 나는 왜 멈추지 못하고 계속 보고 있는가? 정보와 도파민의 홍수 속에서 그러한 부질없는 얄팍한 정보의 필요를 꼭 먼저 생각해보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현대 교육은 말을 사용하지 않는 침묵에 대해서는 가르침도 배움도 전무하다. 언어는 결코 수용적이지 않으며 공격적이어서 존재의 가장 소중한 가치들인 친밀함과 배려, 사랑, 연민, 자비 등을 파괴한다.

당신이 계속해서 말을 하는 행위는 불만스러움을 해소시키는 방편이며, 일종의 해방감을 갖게 한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은 단지 수단일 뿐이고, 당신은 이야기를 그저 뱉어내고 있을 뿐이다.

깊이 공감한다. 나는 침묵을 표현의 수단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현대 교육은 저자의 말 처럼 침묵의 가치를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의 여파인지 현대인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며, 되려 두려워한다. 내가 내뱉는 말이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공감의 의미를 담고 있더라고, 상대방이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일지는 모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침묵은 상대에게 온전히 집중하고 있다는 표편이 될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더 큰 공감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리석음(무지)

인간의 어리석음의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의 부재가 아닌 자신에 대한 인식(앎)[의 부재]이다.

지식은 ‘나는 안다’라는 착각을 일으키기 때문에 축적될수록 자신이 좀 더 깊이 있고 지성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환상을 심어준다.

지식과 정보의 벽돌들을 주변에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결국 자신을 성 안에 가두어 놓는 결과를 초래한다.

당신이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라고 할지라도, 그 충고가 상대방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잘못된 습관의 교정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

자기방어

자신의 잘못을 직시하고 인정하는 솔직함, 개방성, 포용성, 겸손함을 보여주면 문제는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해결된다.

오류의 불인정과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은 우리가 문제를 직시하고 교정하여 보다 성숙한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한다.

내가 가진 가치관의 근거를 단 한번도 의심해보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것이 단지 경험적으로 또는 편의성 때문에 형성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치관의 존재를 느낄 때 마다 그 근거를 의심하고, 그것이 타당한지 점검하는 습관을 들여야겠다.

종교

믿음은 체험이나 ‘앎’이 아니다. 믿음의 치명적인 장애물은 탐구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식하고는 있지만 개선되지 않는 문제점

집착

당신이 투자한 매몰 비용이 클수록 그 가치관을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방면으로 의심해 보는 지성적인 단계로의 진입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의존(노예화)

타인에게 기대하는 모든 것은 그저 희망일 뿐이며, 당신의 의존성은 증대되고 간혹 그 기대가 충족되더라도 일시적인 만족감을 줄 뿐 또다시 당신은 타인에 대해 실망한다.

고독

… 가장 쉬운 방법으로 명품이나 신상품들을 구입함으로써 무언가 만족된다는 느낌을 받고, 자신을 과시할 수 있는 2중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자기관리,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명목으로 옷과 같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과시와 허영이 숨어 있었음을 느낀다.

…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은 지식이나 정보에 관심을 갖고 그것들을 수집한다. 그들은 ‘지식의 포만감’과 ‘자신의 과시’를 느낄 수 있게 된다.

인류의 거의 대부분은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내면의 가난함’의 근본 원인이다.

불안

예기치 않았던 여가의 시간이 생기면 처음에는 휴식을 즐기겠지만, 이내 그것은 당신을 괴롭히기 시작한다. ‘무엇인가를 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육체와 더불어 안정되지 못하고, 신문이나 잡지, TV, 컴퓨터, 스마트 폰 등 그 무엇이라도 자극을 찾게 된다.

당신이 여가 시간을 그저 무위의 상태로 있지 못하는 것은 시간과 삶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주입된 강박관념과 쉼 없이 움직이는 원숭이적인 유산 때문이다. 당신은 평생 휴식할 수 없다. 고갈된 에너지의 재충전 없이 어떻게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겠는가.

관계

가족이나 친구들은 사회생활에서 만나게 된 이익집단의 구성원들보다는 그 허용 폭이 조금 넓을 뿐이다.

잠시의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즐길 수 없다면, 친밀하지 않는 관계이다.

침묵의 불안을 견디지 못하는 거의 모든 에고들은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수준이다.

깊이 공감한다.